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야마가타 아리토모 (문단 편집) == 기타 == ||야마가타 아리토모(1838~1922년)는 근대 일본의 정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쌍벽을 이루던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송하촌숙에서 같이 공부하던 사이인데 훗날 정적이 되었다. 이토가 온건파라면 야마가타는 강경파다. 1890년 제국의회가 설립된 후 첫 수상이 되었다. 그는 개원연설에서 유명한 ‘주권선, 이익선’ 발언을 했다. 일본의 주권선은 일본열도이나 이익선은 한반도라는 취지로 한반도에 대한 군사개입을 정당화하는 생각이었다. 그는 청일전쟁에서는 스스로 야전사령관이 되어 조선과 만주에서 직접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후인 1898년 그는 두 번째로 수상이 되어 내각을 담당했다. 그의 지지기반은 군부와 관료그룹이었다. 메이지유신 직후 사무라이들의 강경한 반대를 물리치고 징병제를 실시한 이래 그는 군부의 대부였다. 야마가타는 이토 히로부미가 헌법과 의회제를 도입하고 이윽고 정당정치를 인정하려는 데에 불만이 컸다. 러일전쟁에서도 러일협상을 주장하는 이토에 맞서 그는 강경론을 주장했다. 결국 그의 영향력하에 있던 가쓰라 타로 내각은 1902년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시아와 대결자세를 강화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그는 참모총장으로 전쟁을 전체적으로 지휘했다. 늘 대외강경 노선을 걷던 야마가타는 한국병합에 대해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토 한국통감이 보호국화에서 병합으로 나아가는 걸 주저하고 있을 때 그와 가쓰라 내각은 한국병합을 향한 움직임을 강화해나갔다. 이토도 결국 거기에 동의했다. 우리가 한국병합을 생각할 때는 이토 히로부미뿐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그 휘하의 가쓰라 타로 내각을 연구해야 할 이유다. - 박훈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야스히코 요시카즈]]는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보다 이 자를 처단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아쉬워하기도 한다. [[다니구치 지로]]의 [[도련님의 시대]]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인데, 사실 일본 좌익, 자유주의자들 관점에선 안중근이 차라리 야마가타를 처단했으면 좋았을거라고 말할 이유가 있다. 한국인 입장에선 비교도 안되게 더 유명할 수 밖에 없지만, 이토는 19세기 후반 특유의 근대 일본제국주의적 의미에선 자유주의적 성향도 꽤 있었고, 유연한 성향을 보였다. 반면 야마가타는 대외정책 뿐만 아니라 당장 근현대 일본 사람들 자신들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사회적 군국주의, 전체주의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국내 정치,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 일본 사회구조의 형성에 있어서 근현대 일본인들은 야마가타의 영향력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느낄수 있었고 때문에 좌익, 자유주의나 그에 준하는 성향의 일본 사람들 입장에선 이토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더욱 악랄해 보이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세고돈,version=2666)]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